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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맏며느리였다. 추석, 설날이면 할머니, 할아버지 댁으로 가서 제사 준비를하다 할머니 연세가 환갑이 지난 이후 부터는 우리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명절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엄마는 일을 하면서 명절 음식을 준비했고 제사 음식 외에도 조카들 먹인다고 감주, LA 갈비 등 이것저것 먹을 것을 더 준비 했었다. 명절이면 늘 좁은집이 북적거렸고 명절 당일엔 이른 새벽에 제사 준비를 하고 산소에 가져가고, 작은집에 나눠줄 음식,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 먹을 음식을 새벽부터 싸서 시골에 내려갔었다.

맏며느리라고 명절에도 친정에 제때 가본 적도 없었다. 늘 일주일 전이나 일주일 후에 외갓댁에 다녀왔었다. 아픈 이후로도 맏며느리의 역할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 암을 발견하고 수술하고, 항암을 하고 정확히는 기억 나지 않지만 잠시 제사를 다시 할머니댁으로 가져갔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회복이 된 후로는 엄마가 다시 제사를 집으로 가져오겠다고 했다. 맏며느리가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해서 엄마는 그 역할을 다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전이가 된 후로 항암을 하면서도 생각보다 엄마는 건강하게 잘 지냈고 제사는 계속 집에서 지냈었다. 암환자였던 엄마는 그렇게 맏며느리의 역할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 하다 항암 약을 바꾸는 주기가 빨라지고 컨디션도 왔다갔다 하면서 제사를 작은집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연휴에도 가게를 하느라 쉬지 못 하시는 작은 엄마였지만 누구보다 엄마 걱정을 많이 하셨기에 흔쾌히 엄마가 짊어지던 제사란 무게를 대신 들어주셨다. 

2017년 추석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작은엄마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시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몇년전부터는 다시 명절에 시골에 가기 시작했다. 

시골에서의 명절은 여유가 있었다. 물론 작은엄마의 가게가 바쁠때는 잠깐 서빙 알바를 하기도 했지만 저녁에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회나 대게를 사오거나 밖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다 같이 둘러 앉아 가볍게 술을 한잔하기도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는 급하게 시골에 와야하는 상황도 아니다보니 확실히 여유가 있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여기저기 근처를 구경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즐거웠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번에는 시골에가서 뭘 할까를 고민했었다.

2018년 추석 제사를 지내고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와 미시령 옛휴게소

재작년 시골에 내려가기 전날 엄마가 응급실이라고 연락이 왔다. 퇴근을 하고 엄마가 있는 병원에 갔다. 엄마는 벌써 낮부터 병원에 와서 있는데 수혈을 해야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그때는 한참 테니스에 빠져 있었어서 동호회에 가기로 되어있던 날이었는데 나는 아빠가 올 때까지만 자리를 지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이 없었다. 엄마는 수혈을 하고 새벽 4시가 다 돼서 집에 왔다. 아빠는 엄마가 아파서 시골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엄마가 그러면 마음이 더 불편하다고 다녀오라고 아빠를 설득해 처음으로 명절에 엄마 없이 시골에 가게 됐다.

2019년 추석 - 바다에서 올라오는 달을 보면서 엄마 더 오래 살게 해달라고 소원 빌었었는데..

추석에 제사를 지내고 바로 집으로 올라왔다. 엄마가 응급실에 가서 시골에 가지 못 하니 모두들 걱정하고 집에 찾아 오셨다. 수혈하고 컨디션이 조금 나아진 엄마와 엄마를 보러 찾아온 친가 식구들과 을왕리에서 바다를 보고 조개구이를 먹었다. 엄마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엄마가 통 먹지 못 했다. 

 

을왕리에서 엄마 뒷모습 - 노을지는 풍경

엄마는 당시 맞던 항암제를 많이 힘들어 했었다. 늘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치료 받던 엄마가 그 당시 쓰던 항암제 이후 이제는 못 이겨 낼 것 같다고 했고 더 이상 항암 치료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먹지도 못 하고 기력도 없어하고 살도 많이 빠졌다.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년 추석엔 엄마가 있을까?", "다가오는 설에는 엄마가 있을까?" 겁이 났다.

항암 할 때마다 수혈을 해야했었고 항암제도 금방 내성이 생겨서 약을 바꿔야하는 상황이 됐다. 

다행이 약을 바꾸니 먹는 것이 조금 나아졌고 기력도 조금 다시 찾았다. 그리고 설날까지 엄마가 곁에 있었다.

2020년 설날 - 엄마 다리 배게

설날엔 오히려 살이 쪘고, 건강도 많이 나아진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었던 것 같다. 설날에 엄마랑 다시 시골을 찾으면서 "설날까지 엄마가 살아있다. 다행이다. 추석엔 엄마가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괜찮을거라고 엄마 앞에선 얘기 했지만 엄마의 부재에 대한 생각이 한번 난 뒤부터는 머릿속으로 자주 그런 생각을 했었다.

엄마는 정말이지 자주 항암약을 바꿔야 했고 2020년 8월 우리는 항암을 중단했다. 더 이상 엄마 몸으로 버틸 수 있는 약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다시 다가 온 추석을 앞두고 엄마는 다시 응급실에 있었다. 추석이 불과 2주 남아 있었고 이번에도 엄마는 시골에 가지 못 했다. 

응급실에서 잠시 산책 나와서

당시 엄마가 요양병원에 있었기에 엄마는 아빠가 걱정한다며 응급실에 있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했다. 일단 아빠에게는 말하지 않고 밤새 엄마와 응급실에 있었다. 엄마는 밤새 추워했고, 열이 올랐다. 발이 너무 시리다고 해서 만져보니 얼음장 같아서 손으로 만져주다 엉덩이로 엄마 발을 깔고 앉고 밤새도록 엄마 곁을 지켰다. 다행이 새벽에 열이 떨어지고 아침엔 엄마와 응급실 앞에 잠시 산책을 나가 도란도란 얘기를 했었다. 기억 나는 대화는 "추석 때마다 응급실 오는게 연례 행사가 됐네?"라고 말 했던 기억이 난다. 날이 너무 좋아서 엄마랑 같이 하늘을 보고 엄마가 머리가 빠진다는 그냥 일상적인 얘기를 했다. 그날 봤던 맑은 하늘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우리는 응급실에 있었지만 그렇게 슬퍼하진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벌써 1년이나 된 이야기다. 엄마에 대한 기억은 정말이지 생생한게 많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암환자가 명절마다 음식하는데 딸이라고 음식도 못 한다고 돕지도 못 한 것 같아서 정말이지 죄송한 마음이 많이 든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니 작년, 재작년 응급실에 갔던 기억이 났고 생각 난 김에 사진을 찾아보니 그래도 시골로 제사를 옮겨간 후로는 좋은 시간이 많았던 것 같다. 

 

역시 명절엔 시골에 가야 맛인데 코로나로 가족들 다 같이 모이기 쉽지 않다. 한편으로는 엄마가 이런 흉한 세상을 안 보고 간 것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엄마는 없지만 가족들 다 같이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갖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명절이 빨리 다시 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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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부터 쓰는 글은 내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사랑이 존재하며 그 사랑을 준 엄마와의 추억 이야기다.

 

엄마가 떠난 뒤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를 생각한다.

20대 중반엔 초등학교 입학 전의 나의 모습 중 뚜렷하게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30대 후반이 된 지금은 초등학교 입학 전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고 20대의 내가 기억하는 모습만 남아 있다.

엄마와 즐겁고 행복한 추억들이 많은데  내가 나의 기억력을 믿지 못 해 그 추억 중 하나라도 잃어버릴까 지워지기 전에 글로 남겨둬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픈 후로 사라질까 불안한 마음에 기억할 수 있는 수단(가족사진, 캠코더, 핸드폰 사진 및 동영상, 통화 녹음, 엄마랑 병원 간 일들을 적은 블로그 등)을 많이 만들어 놓았었다.

덕분에 엄마와

재밌는 일도,

슬픈 일도,

행복한 일도,

위로가 되는 일 등

추억을 많이 기억 할 수 있었다.

 

엄마가 떠난 뒤에 보고싶어 힘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일 힘든 건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에 다시는 엄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엄마와의 추억을 정리하면서 엄마가 없는 내 삶을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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